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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4-14 14:23
제2회 작가와의 대화(손병걸)
 글쓴이 : 문계봉
조회 : 1,132  
이번 인천작가회의 시분과 모임에서는 두 번째로 '작가와의 대화' 시간을 갖습니다. 
해당 작가는 손병걸 시인. 참석하기 전에 손 시인의 작품을 읽고 오시면 좀 더 깊은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손 시인의 작품 10편을 올립니다. 

손 병걸 시 모음

 

낙하의 힘

모든 것은 때가 되면 떨어지고
떨어지는 그 힘으로 우리는 일어선다

그때도 그랬다 천수답 소작농
시도 때도 없이 떨어지는 쌀독
수백 미터 갱 속 아버지의 곡괭이질
시래기 담은 대야를 이고 눈길을 헤치던 어머니의 힘으로
우리 형제는 교복을 입고
김이 오르는 밥상 앞에 앉아왔다

어느덧, 딸내미 책가방도 무거워 가는데
느닷없이 캄캄해진 내 눈동자
떨어지고 떨어지는 살림 탓에
나는 익숙지 않은 흰 지팡이를 펴고
늘 시큰둥한 면접관을 만나러 간다

떨어지는 힘으로 제자리를 잡는 일
우리가 사는 일 뿐은 아니어서
꽃봉오리, 꽃잎이 떨어지는 힘으로
열매가 익어 떨어지고, 땅은 씨앗을 품듯
떨어진 이파리가 겨울나무의 발목을 덮어주며
기꺼이 썩어지는 열기로 봄은 돌아오는 것

보라, 떨어지는 별들의 힘으로
구천을 떠돌던 영혼들이
하늘에 내어준 빈자리에 자리를 잡듯
그 순간, 별똥에 비는 것도
다들 낙하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손가락 끝에 박힌 눈


깨진 유리컵에 베인 손가락
점자책을 더듬을 때 아파서
며칠째 한 페이지도 넘어가지 못한
내 손가락 끝에 박힌 눈

본 적 있다 이맘때쯤, 그 봄날
베인 상처를 파고드는 소독약에
자르르 퍼지는 통증처럼
한나절 봄비 내린 후
대지에 돋아나던 새싹들
그 푸른빛의 살점들

떠오르는 햇볕 한 줌이라도 더
부서지는 저녁놀 한 줌이라도 더
동공 속에 담으려다가 끝내는
두 눈처럼 꽉 닫혀버린 창문 밖
저 나뭇가지에 앉아 재잘대는 새들처럼
저마다 소리 내고 만져지는 건
그만큼 통증을 삼킨 상처다

거기서 솟아오른 살점들이다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직접 보지 않으면
믿지 않고 살아왔다

시력을 잃어버린 순간까지
두 눈동자를 굴렸다

눈동자는 쪼그라들어 가고
부딪히고 넘어질 때마다
두 손으로
바닥을 더듬었는데

짓무른 손가락 끝에서
뜬금없이 열리는 눈동자

그즈음 나는
확인하지 않아도 믿는
여유를 배웠다

스치기만 하여도 환해지는
열 개의 눈동자를 떴다

빛의 경전

점자책을 펼치니
와르르 쏟아진다
놀란 가슴 쓸어내리며
흩어진 점자를 더듬어 가는데
들려온다, 별들의 이야기

팽팽한 점자처럼 별들도
광활한 우주 속에서
제자리를 지키며 빛나고 있기에
거대한 경전을 읊는 것이라고,

아무도 찾지 않는 어둠 속
비루한 생활의 문을 열고
한 발짝 한 발짝 내딛는 삶이
빛나는 경전을 집필하는 것이라고,

밤새 소곤대는 별들을 따라 걷다 보니
짓무른 손가락 끝이 화끈거리고
어깻죽지 목덜미가 뻐근하지만
몸속에 알알이 박힌 별들 탓일까?

창문 너머 별빛 점자를 찍어가는
가파른 새벽 발소리
맨홀 속 은하수, 물소리도 환하다

아이가 아빠를 키운다

아빠 식사하세요
밥 때만 되면
아이의 목소리 들린다

자식이라고는 단 하나
고작, 초등학교 3학년
생일이 빨라서 3학년이지
이제 아홉 살짜리다

밥상에 앉으면
이건 김치, 빨개요
요건 된장찌개, 뜨거워요
두 눈이 안 보이는 아빠를 위해
제 입에 밥알이 어찌 되든지 말든지
오른쪽에 뭐 왼쪽에 뭐
아이의 입은 바쁘다

요란한 밥상이 물러나면
커피는 두 스푼
설탕은 한 스푼 반
크림은 우유가 좋다며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내게
깡충깡충 커피를 가져다준다

아홉 살짜리 아이가
아빠를 키운다




눈길

부르기만 하면
목소리 쪽으로 고개가 돌아간다

보이지 않는 내 눈을 잊은 것이 아니다

언제나 의식보다 먼저
돌아가는 얼굴, 열리는 눈동자
보여 주는 것이다

서로 마주치는 순간
환해지는 마음
한길이 되는 것이다

가끔은, 아무도 호명하지 않는
캄캄한 길
우두커니 별들을 한차례 바라보고 있을 때
깜박깜박 시린 눈동자

걸음마다 고인 그리움만큼
속속들이 젖은 눈동자의 오래된 습성이다

작설차를 마시며

혼자 마셔도
혼자가 아니어서 좋다

흙바닥을 쪼던
딱딱한 부리 속에
부드러운 혀가 숨어 있다

귀를 기울이면
그윽한 말 중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말이 있다

원망, 그 한마디 말보다
날개를 키워왔다는 말
내 목구멍을 핥아줄 때
두 눈을 잃은
절망의 부기가 가라앉는다

식어가는 찻잔에 남은
마지막 한 방울 말까지 마시고 나면
세상 구석 미세한 소리조차 받들어 마시는
창문 밖 저 귀가 큰 겸손한 고요

덩치 큰 어둠의 입술도 달싹거린다

하모니카 소리

들숨 날숨 몰아쉬며
숨이 넘어가도록
땀을 쏟는 일이겠지

조금 짧게 매우 길게
조금 낮게 매우 높게
빨랐다 느렸다 쉴 새 없는 저 곡조
휘몰아치는 바람 탓에
온몸이 떨리는 소리겠지

때론 주체할 수 없는 눈물
때론 환한 웃음 짓는 것
숭덩숭덩 뚫린 몸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겠지

그래 파이고 뚫리지 않고서야
어찌 애달픈 곡조가 흘러나오겠어
그래 바람 찾지 않는 계곡에
어찌 아름다운 노래가 있겠어

아무렴 살아 있으니
멈출 수는 없는 노래지

열쇠를 잃다

주머니를 뒤지는데
열쇠가 없다

뜯어진 안주머니
내 몸속 단단한 실밥이
풀리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인가

수년 전, 두 눈을 잃어갈 때
병원을 데리고 다니던 지인들
가족을 돌봐준 친구들
그들이 나의 열쇠였다

하지만 지금,
나는 혼자이고
문은 잠겨 있다

따뜻한 집 문을 열 수가 없어
굳게 잠긴 문밖에 갇혀 있다

언제나 딱 맞는
열쇠인 적이 없었던 나는
으슬으슬 떨고 있는 수인이다

긴 침묵

대갈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 아이는
땅바닥만 보고 걸었다
우리가 학교에 가는 아침이면 그 아이는
논둑에 쭈그리고 앉아 이슬을 보면서 맑게 웃었고
우리가 학교에서 돌아올 무렵이면 그 아이는
잠자리 날갯짓을 흉내 내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돌멩이를 던져대던 우리가
그 아이의 머리가 무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건
그 큰 머리를 번쩍 들고 저수지로 뛰어든 뒤부터였다
서울에서 놀러 온 여자아이를
악착같이 저수지 물 밖으로 밀어낸 뒤부터였다
그날 이후, 어느 누가 먼저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우리는 저수지와 먼 곳에서 놀았고
저수지를 빙 돌아 먼 길로 학교에 다녔다
여름이 되면 갈라지는 논바닥 때문에
동네 어른들이 양수기 호스를 저수지에 담그며
간간이 혀를 찼을 뿐 우리는 머리가 다 굵어지도록
그 아이에 대한 그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보름달을 삼키고 말이 없는 저수지처럼
썩지 않을 침묵을 오랫동안 일관(一貫)하였다

아이의 나눗셈

숙제를 하던 딸아이
나눗셈을 하는데
자꾸만 하나가 남는다고
차라리 불쌍한 사람에게
그냥 줬으면 좋겠단다

찬찬히 문제를 듣고 보니
친구들과 문구를 사고
홀수로 남는 돈을 소수점 값으로
정답을 요구하는 문제다

근엄한 목소리로 이렇게 요렇게
정답 구하는 요령을 알려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