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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6-22 12:32
제3회 작가와의 대화(최종천 시인)
 글쓴이 : 문계봉
조회 : 803  

지난 주말 인천작가회의에서는 올 들어 세 번째로 <작가와의 대화> 행사를 진행했어요. 이 행사는 회원들의 시 세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해 보자는 취지로 마련된 행사로서 작가회의 내 시(詩) 분과 주관으로 두 달에 한 번씩 진행되고 있지요. 이날 ‘도마’ 위에 스스로 올라간 대상 작가(시인)는 최종천 시인이었어요. 그의 시론은 물론 파란만장했던 삶의 연혁을 생생하게 들어볼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답니다. 발제(시 해설)는 제가 하고 사회는 시분과장인 김명철 시인이 맡았습니다.


“성, 사랑과 구원을 위한 가장 원초적이면서 적극적인 행위”
―최종천 시인의 성과 성애 시편들에 대한 소고(小考)


1. 성, 그리고 성애에 대한 원론적 접근, (해설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생물학적으로 포유류의 한 종(種)인 인간은, 모든 생명체가 그렇듯 생식(sex)을 통해 개체를 보존하고 종족을 번식시킵니다. 쇼펜하우어는 일찍이 이러한 본능을 일컬어 ‘종족의 살고자 하는 의지’라고 표현하기도 했지요. 굳이 쇼펜하우어의 말을 빌려올 것도 없이 성(性)은 생물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삶의 방식이자 필연적 행위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줄 압니다. 다만 인간에게 있어 성은 다른 종들의 그것처럼 개체 보존과 종족번식을 위한 행위만이 아니라 적극적 사랑의 표현방식일 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따라서 거기에는 종의 번식을 위한 ‘의식’으로서의 ‘거룩함’이나 본능으로 부여된 종의 의무를 이행할 때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욕망이 생성되는 것이지요. 이 욕망은 사랑을 완성하게 해주는 계기이자 삶의 적극적 동력으로 작동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체가 살아가기 위한 근원적인 시스템인 셈이죠.

호모 에렉투스로(직립보행)서의 인간은 아마도 상대를 마주보며 성애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종(種)이다 보니, 상대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더 애틋할 수 있고 또한 호모 로퀜스(언어적 인간)로서의 인간은 그 과정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 관계의 농밀함은 더욱 증폭될 수 있었을 겁니다. 이렇게 본다면 성애가 인간의 다양한 사랑 방식 중 하나인 게 아니라 어쩌면 인간의 사랑이란 성애에서 비롯된 하나의 파생적 정서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에 대한 시선은 문화와 시대에 따라 다양한 편차를 보였던 게 사실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고 우리나라만 해도 ‘감추어야 할 내밀한 행위’에서 ‘사랑을 위한 당당한 표현’이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이런 원초적이고도 적극적이며 숭고한 사랑으로서의 성애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시작과 더불어 상품화되고 도구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물론 그 이전에도 비합법적(?) 성애가 은밀하게 이루어지긴 했지만, 자본주의 시대의 그것만큼 대담하고 합법적으로 상품화되어 팔리진 않았다는 말이지요. 하긴 자본주의에서는 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다 상품화시킬 수 있지만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성애는 이제 한낱 쾌락의 도구로 전락하고 그 쾌락을 더욱 가속화하기 위한 다양한 시스템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도구화, 상품화 된 성이 일반화 된 사회에서는 더 이상 생명 탄생의 신비함이나 가장 적극적이고도 최종적인 사랑 행위로서의 섹스는 불가능해지는 것이죠. 질탕한 욕망의 배설만 그득할 뿐인 세상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최종천의 시는 바로 여기서 출발합니다. 그는 현재를 이미 도구화, 상품화 된 성으로 넘쳐나는 세상이라고 진단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온갖 ‘헛것’들만 난무하고 있다는 것이죠. 생명의 탄생은 줄어들고 죽은 사랑, 다시 말해 도구화된 성과 욕망배설 방식으로서의 sex만이 허다한 세상, 최종천의 성애 시편들은 이 지점에서 비장하게 출발합니다. 본원적인 사랑의 회복을 위한 전사처럼, 때로는 욕망의 배설물들을 적재하는 창고로 전락한 탐욕의 세상을 질타하는 구도자처럼 말입니다.

2. ‘최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본래적 가치를 잃은 성과 도구화된 욕망의 배설 창구로서의 성애를 극복하기 위한 최종찬 시인만의 방식은 무엇일까요. 이제 구체적 작품을 매개로 해서 최종천 시인의 성 관념이 그의 작품에서 어떻게 형상화되고 있는 가를 살펴보기로 하지요.

(1) 대한 성 독립 만세!―성의 수단화에 대한 비판
일단 그는 당당하게 성의, 성에 의한, 성을 위한 삶의 가치(의미)를 선언합니다. 다음 시를 볼까요.

당연하게도 우리들 대다수는
성이 없는 사랑보다는,
사랑이 없는 성을 원한다! 그것은 옳은 일이다.
성이 사랑을 낳았다.
이제 본론을 말해야 할 것 같다.
인간에게 성은 유일한 實在이다.
그 외의 모든 것은 허구이다, 특히 예술을 핑계 삼아
성을 수식하거나 상징화하지 말자.―‘그리운 곡선’ 중에서

이 시에서 그는 성을 인간의 유일한 실재로까지 그 의미를 격상시키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 외의 모든 것은 허구’라고까지 말하며 ‘예술을 핑계 삼아 성을 수식하’는 예술가들의 행태를 지적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논쟁적 표현까지 불사하며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을 수단화, 도구화 시키는 것에 대한 불편한 심기일 것입니다.

(2) 여성성의 회복을 통한 성의 외연 확대 전략
더 나아가 최종천 시인은 고대 그리스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 개념을 빌어 기독교 신앙에 나타난 남과 여(그의 표현을 빌자면 수컷과 암컷)의 위상과 개념을 해석합니다. 다음 시를 볼까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론으로부터
얻어지는 타당한 결론은
말하자면 암컷은 수컷의 질료라는 것이다.

나는 유물론자로서 무릇
몸이 있고서야 그 몸에 맞는 정신이
깃든다고 생각한다. 
수컷들이 암컷을 두고 싸우는 것은
이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형상이 질료를 입지 못하면
그게 다른 것이 아니라 귀신이다. 
수컷에게는 뭐든지 이데올로기가 된다.―‘수컷’ 중에서

형상의 제공자인 신은 남성(수컷)이고 그 남성(수컷)의 질료는 여성이라는 것이죠. 이 발상은 동양의 고전인 효경에 나오는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은 날 기르시니’(남성은 씨앗, 본질이고 여성은 밭이라는 다분히 남성 중심적인 사고의 표현)의 관점과는 무척이나 대조된다고 하겠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발상의 이면에는 질료로서의 남자가 형상으로서의 여성을 ‘입지 못하면’(받아들이지 않으면) 남자는 귀신이 되거나 이데올로기의 생산자일 뿐이라는 말인데, 상당히 논쟁적인 이 발언의 이면에는 현 기독교에 팽배해 있는 남성(수컷)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심리가 깔려있다고 보여 집니다. 최종천의 시에서 일관되게 관철되는 관념 중 하나는 남녀의 상호평등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종종 남성성에 대한 비판과 여성성의 예찬으로 표현되곤 합니다. 현하의 남성 중심적 사고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평등적 관계를 위한 불가피한 전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시 ‘이데올로기 개론’이나 ‘모계사회’ 등의 시편들도 같은 생각을 드러낸 시편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평등한 관계를 통한 성애의 완성과 복종의 변증법
따라서 위와 같은 최종천 시인의 사고는 성, 혹은 성애에 있어 남성과 여성의 평등한 관계를 강조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도구화, 상품화 된 성, 혹은 성애에 있어서는 강자와 약자, 갑과 을 등 수직적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이지만(심리적 차원에서 그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애도 사랑의 행위이므로 행위 당사자들 사이의 심리적 관계 다시 말해서 애정의 강약에 따라서 수직적 관계가 만들어 질 수도 있다고 본다. 또한 성을 상품으로 생각하고 구매하는 경우에는 경제적 우위에서 그것을 ‘사는 자’와 ‘파는 자’의 수직적 관계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진정한 성애란 사랑을 전제한 남녀의 동등한 관계(위상)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인간이 문명으로 자연을 정복하겠다는 것은
섹스를 통해 상대를 완전 정복하겠다는 것과 같이
환상이다. 섹스에 있어서 완전한 정복은 완전한 순종이다
상대방을 만족시켜야만 정복할 수가 있는 것이다.―‘그리워’ 중에서

기실, ‘상대방을 만족시’킬 수 있으려면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동등하지 않으면 불가능할 거라 생각합니다. 여기서 특히 주의 깊게 살펴 볼 점은 시인이 남과 여의 관계를 인간과 자연의 관계로 종종 치환한다는 접입니다.(‘그리워’, ‘자연을 정복하는 방법’ 등의 시편들이 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려는 것은 문명을 이루어 좀 더 편안하고 만족스런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 때문인 것처럼, 남자가 여자를 ‘정복’하려는 것도 만족을 위해서라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주의 깊게 봐야 할 점은 그 ‘만족’이 이기적인 만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성이 섹스를 통하여 여성을 정복하겠다는 것은 만족한 섹스에 대한 욕망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정복은 만족한 삶을 누리겠다는 욕망인 것이다. 남성의 섹스를 통한 여성의 정복은 여성의 요구를 만족시킴으로서만 가능하다. 여성의 요구에 순응하고 여성이 만족해야 남성도 만족하게 되는 것이다.-‘자연을 정복하는 방법’ 중에서

다시 말해서 남성의 만족이란 결국 자기와의 성애를 통해 여성이 만족하는 모습을 볼 때 채워진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복종’을 강조합니다. 인간이 자연에 복종하게 되면 자연은 ‘만족하게 되고’ 그 결과 인간과 자연은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인간이 잘 살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남성도 여성의 요구에 순응해야만 ‘만족한 섹스’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복종이 오히려 평등한 관계 혹은 완성된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역설의 변증법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셨을 겁니다. ‘복종’은 나약한 순응이 아니라 발전된 관계를 위한 일종의 전략인 셈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성 평등 선언은 비단 남녀 사이만을 겨냥한 것은 아닙니다. 다음 시를 보시죠.

그녀들은 빨갱이, 목사, 거지, 공산주의자, 자본가를 
가리지 않고 벗긴다. 이 지상에는 돈이나 재산 권력보다
더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이다. 성 앞에 인간은 평등하라!
생명으로 죽음에 맞서는
롯의 딸들에게 장미를!―‘성 앞에 평등하라’

무척이나 격정적인 심정을 명령형 어미 속에 드러낸 이 시 구절을 보면 그가 얼마나 전방위적으로 여성성을 예찬하며 동시에 ‘성의 평등’을 강조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4) 생명 탄생의 거룩한 소명 혹은 구원을 위한 제의로서의 성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성은 생명을 가진 존재들의 종의 번식과 개체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겠지만 여타의 종들과 달리 본능만이 아닌 사랑을 전제로 이루어진 성애의 결과물이기에 인간에게는 새로운 생명(아기)이 사랑의 완성으로, 그 신비한 열매로 인식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수태와 출산 능력을 가진 여성은 그 자체가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이 드러난 다음과 같은 시를 살펴봅시다.

달의 지름이 커지면 모든 아내들은 달거리를 하고
지아비들은 입덧에 걸려 넘어진다
사내들은 달의 둘레를 멀리 돌아서
아내에게 가야한다
달과 간통하지 않는 여성은 어머니가 되지 못한다
해는 하늘의 눈, 달은 하늘의 상처
상처를 통하여 인간을 보는 하늘이다
오늘 소녀 하나가 초경을 경험한다
달이 은밀한 손길로 인류의 미래를 위해
소녀의 몸을 경작하고 있는 것이다.―‘월경’ 중에서

제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제출한 시 중에서 가장 절창이라고 생각되는 이 시에서 시인은 소녀의 달거리를 ‘인류의 미래’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소녀가 ‘월경’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소녀가 월경을 시작했다는 것은 그녀가 이제 수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낳을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인류의 미래와 직결될 만큼 소중하고 신비한 일이라는 시인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고 하겠습니다.

3. 남는 문제들―치고 빠지며
이 글은 최종천 시인의 시편들 중 극히 일부분―성과 성애를 통한 사랑―만을 다룬 해설입니다. 따라서 필자의 과문은 차치하고라도 최종천이라는 시인의 진면모를 조형(造形)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가진 글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렇지만 시인 본인이 주제를 염두에 두고 자선(自選)한 시편을 살펴보았기 때문에 적어도 해당 주제와 관련한 시인의 생각은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혔으리라 (함부로) 생각합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공간적으로는 음지의 문화로 치부되었고, 시간적으로는 여전히 구시대적 사고의 완강한 프레임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지 못한 성과 성애(sex)에 대해 최종천 시인은 무척이나 당당하고 다채로운 생각의 결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름다운 사랑의 가장 적극적 방식인 성애가 도구화 상품화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논쟁적이고도 도전적인’ 그의 표현들은 어쩌면 그만큼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는 것의 반증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생명 탄생의 신비함이 폄훼되거나 사라진 시대, 아이를 많이 낳으라고 돈을 주며 독려하는 세상에서 그가 새삼 성과 성애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그의 고민이 이제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문제의식에 도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합니다. 앞으로 그의 이러한 고민과 시적 고뇌들이 왜곡된 성과 생명의 가치에 대한 폄훼의 현실을 돌파하는 데 유력한 동력으로 작동하기를 동료 문우로서 기원해 봅니다. 또한 그러한 과정을 통해 한국 시문학의 주제와 소재 차원의 지평도 아울러 넓어지기를 바라봅니다.[문계봉]